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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25-16 창4가이드

창4:1-17,25-26, 핵심 구절 창4:7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올려 드리는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오늘 2025년 열한번째 주일을 맞아,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은택들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성령님의 은혜와 또 그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영광과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의미하고 또 그 영광이 그리스도와 우리들에게 주어지고 또 하나님께 돌려지는 영광의 선순환과 또한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함께 살펴 보았는데, 이번 주에는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진 후,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한번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먼저 오늘의 본문의 context 를 살펴 보면, 창 1장과 2장의 하나님의 창조에 이어 창3장에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이제 4장에서는 그들이 낳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두 아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 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으시자, 이에 화가 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임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상에서 첫 살인이 발생하였고, 이에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며 가인에게 물으시자, 자기는 알지 못한다고 거짓말하면서 오히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며 하나님께 대들었고, 이에 하나님께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하시며 그 죄로 이제 가인이 땅의 저주를 받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징벌을 내리시자, “자기의 벌이 너무 무겁다”하며 만나는 사람들이 그를 죽일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께 항변하였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해 주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이렇게 창 1장에서 4장에 걸친 이야기들에 대해서 신학적인 의미를 한번 정리해서 살펴 보면, 먼저 창 1장과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의 꽃인 인간은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는데 이들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하시며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을 주셨고 또 인간에게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또 온갖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가득한 에덴 동산에 살면서 그것들을 경작하며 지키며 살게 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시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들이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따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시며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는데, 이 행동은 선악간 판단과 심판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들 자기 뜻대로 하겠다는 것이었고, 이 첫 죄의 근저에는 교만과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와 같이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죄는 인간에게 영적, 육체적, 영원한 죽음을 가져 왔을 뿐 만 아니라 인간은 고통과 고난의 삶을 살게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과도 다른 인간과도 또 자연과도 분리되었을 뿐 만 아니라 참 자아로 부터도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죄와 또한 그 결과의 영향이 처음 자범죄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오늘 창세가 4장에 나오는 형인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 죽인 살인 사건이었는데, 그 원인은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사는 받아 주셨지만, 자신의 제사는 받아들여 주지 않으시자 동생을 질투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인 사건이었는데, 이렇게 형제 간에 저질러진 잔인한 살인죄의 이면에는, 믿음의 제사를 올려 드리지 못한 불신과 서로 돕고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과 또 심지어 이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과하다며 항변하는 즉 자기 뜻대로 선악을 결정하고 심판하는 교만을 발견할 수 있고 또 그 이후 자기 아들을 낳아 ‘에녹’ 즉 ‘헌신’이라는 이름을 지은 후 자기가 쌓은 성의 이름을 그의 아들의 이름을 사용하여 ‘에녹’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결국 이제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살아가는 그의 삶의 방향성을 나타내 주는 사건이었는데, 결국 그래서,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그의 책 ‘문명 속의 불만’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란 플라우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강력한 공격성을 본능적으로 타고난 동물이다. 결국 그에게 이웃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나 성적 대상 대상일 뿐 아니라, 자신의 공격성을 충족시키고, 보상 없이 노동력을 착취하고, 동의 없이 성적으로 이용하며, 가진 것을 빼앗고, 모욕하며, 고통을 주고, 고문하고 죽일 수 있는 대상이”라고 말했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인간은 법과 권리가 없으면 가장 사악하고 위험한 존재다”라고 말했던 것인데, 반면에 하나님의 용서를 바탕으로 한 믿음의 계보의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도 오히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이와 같은 인간의 창조와 타락에 대하여 벨직 고백서 제14조에서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는데요. 즉,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지으시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뜻에 일치되게 사람이 뜻하도록 하기 위하여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으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영예로운 가운데 있었음에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자기의 탁월성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죄에 복종 시킴으로 악마의 말에 귀를 기울여, 사람에게 부과된 생명의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지어 그 결과 죽음과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죄 때문에 사람은 자기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기의 본성이 전부 부패되어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리고 이렇게 악하고 왜곡되고 또 자기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부패되어, 하나님에게서 받았던 자기의 탁월한 소질들을 다 상실 하되 다만 몇 가지만 남아 있게 되었으나 이것 만으로도 사람이 변명할 수 없게 되기에 충분하였는데, 왜냐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인간 안에 있는 모든 빛은 어둠으로 변하였기 때문인 바, 그래서 요한은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그 빛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사람을 어둠이라고 불렀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은 단지 죄의 노예일 뿐, 하늘로 부터 주어 지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고 믿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람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시면서,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4)      이 벨직 고백서의 고백 내용을 한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흙으로 창조 하시되,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으셔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그의 뜻을 일치하도록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 수 있도록 선하게 창조 하셨다는데 여기서 우리는 선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선 즉 영어로 goodness 는 옥스포드 사전적 의미로는 a) that which is morally right 즉 도덕적으로 옳은 것 혹은 b) benefit or advantage to someone or something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대해 이익 혹은 이득이 되는 것 을 뜻한다고 하였는데, 신학적 의미로는 루이 벌코프가 그의 조직신학책에서 정의하기를 선이란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되셔야 할 모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로써 표현된 관념과 완전히 일치하다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이를 인간에 적용하면 결국 선이란 인간으로서 마땅히 되어야 할 모든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뜻하셨던 모든 것에 부합할 때 선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이를 벨직 고백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선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일치하여 살 수 있도록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5)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해 존 스토트가 그의 책 ‘온전한 그리스도인’에서 설명한 내용은 참 의미가 있는데요. 존 스토트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지성과 의지가 있습니다. … 따라서 그 말은 두가지 의지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지와 나의 의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의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부모에게서 독립하려는 것이 어린이의 성숙의 과정이듯, 사람은 하나님께로 부터 반역하여 독립을 꾀할 때에만 성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자율을 선포하면서 주님이신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죄라고 말하며, 성경에서는 바로 이것이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도 창조주에게 반역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고 또한 이스라엘도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완고하게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으며, 오늘날의 우리도 똑같은 죄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의 이성적인 관계는 반역이 아니듯 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흡입되는 것 또한 이상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이것은 동양 신비주의의 특징으로 말미암은 오류인데, 힌두교나 불교 등의 동양의 신비주의는 자신의 개체성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거나, 또 ‘최고의 존재’, ‘실제’, ‘세계의 영혼’ 등 어떤 명칭으로 부르든 간에 에 신에 대항하는 그 자신의 존재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신비주의자는 열반에 몰입되어, 존재의 대해 속에 있는 물방울 같이, 또는 태고의 불길 속에 있는 불꽃같이 동화되기 위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무아의 경지가 되기를 갈망하는데, 이 또한 기독교적이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하여 분명한 개체성을 가지도록 창조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누릴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여러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며 나는 나 그대로 영원히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인간의 의지의 관계는 반역도 일방적인 흡수도 아니며, 대신 복종, 그것도 자발적인 복종의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에서 우리는 그 순종의 모범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아버지를 거슬러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지도 않으셨고, 반면 자신의 의지를 거두어 들여 아버지께 흡수되기를 갈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계속 지닌 채 아버지께 복종시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이렇게 우리 의지의 반역이나 소멸이 아니라 의지의 자발적인 순종 가운데서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 날 밤 겟세마네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을 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며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의 참 의미인 것입니다. 즉 자유의지란 모든 권위와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의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유의지는 신적 의지에 흡수되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으로 고백하고 그 분의 뜻에 자신을 내어 드림으로써 오히려 자신에게 속박된 것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 의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 6:18 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도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진리 가운데 서는 것 즉 모든 거짓을 배격하는 것에서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7)     즉 선하다는 것이 마땅히 인간이 인간답게 살 때 선하다라고 할 수 있듯 진정한 자유 또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바로 자유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자유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면적 자유가 없는 외부적 자유란 무가치한 것입니다. 비록 내가 외부적 압력에 의한 굴복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무지, 죄악, 이기주의, 공포 등으로 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는 다음과 같은 사람 만을 자유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그 속에 교만, 분노, 태만이 활동하는 자기 자신에게 사로 잡힘이 없이,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용의가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참 자유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8)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복종시키는 것 만이 우리가 다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 8:32 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요 14:6 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요 8:36 에서는 그래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옵기는, 올 한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참 뜻을 깨닫고, 진리이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복종시킴으로 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소그룹 모임 가이드 및 예제 질문

Q1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되,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일치하도록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그 뜻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 보고, 과연 그렇게 살아 왔는지 돌아 보고,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팀원들과 나누면서 은혜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Q2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고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팀원들과 나누면서 은혜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기도 노트

(  오늘 말씀중 깨달아진 하나님의 성품  ) 하나님 아버지!

(  지난 한주간 혹은 오늘 하루 동안 감사한 일들 ) 해 주심에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        깨닫게 해주신 죄          )를 깨닫게 해주셨음에 감사하며,

회개할 때에 용서해 주옵시고 이제 (  새 삶  )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하여 ( 새롭게 배운 점 ) 을 가르쳐 주심에 감사하며

(    삶의 도전     )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 주님의 성품 ) 우리 주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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